삼랑진소개 삼랑진의 유래  

 

삼랑진(三浪津)의 지세(地勢)와 연혁(沿革)

 

밀양군(密陽郡)의 이읍(二邑) 구면(九面) 가운데 하나로 군내(郡內) 동남변(東南邊)에 위치하여  밀양(密陽), 양산(梁山),  김해(金海) 등 세 고을이 접경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응천강(凝川江)이 낙동강(洛東江) 본류(本流)에 흘러드는 지점(地點)으로 세 줄기 큰 강물이 부딪쳐서
물결이 일렁이는   곳이라고 하여 삼랑진(三浪津)이라 하였다.


동북쪽으로는 화강암지대(花崗岩地帶)의 울퉁불퉁한 산악(山岳)이 읍(邑)의 배경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응천강(凝川江),  낙동강(洛東江) 두 강의 흐름을 따라 그 연안(沿岸)에 형성된 충적토(沖積土)로 하여 임천(林川), 안태(安台), 송지(松旨), 율곡리(栗谷里) 등의 마을 앞에 넓고 비옥한 평야가 전개되었다.


동(東)으로 금오산(金烏山)(720m)에서 맥을 이은 천태산(天台山)(632m) 자락이 작원관(鵲院關) 벼랑 아래로 떨어지면서 양산군(梁山郡) 원동면(院洞面)과 경계를 이루었고, 남(南)쪽으로 낙동강(洛東江) 하류의 도도한 흐름을 건너 김해군(金海郡) 생림면(生林面)과 군계(郡界)를 지었다. 서(西)쪽에 질펀한 응천강(凝川江) 하류를 사이에 두고 상남면(上南面)의 곡창지대와 마주 보고 있으며, 북(北)쪽으로 만어산(萬魚山)(670m)과 자씨산(慈氏山) 줄기를 경계로 단장면(丹場面)과 대치하였다.


 옛날부터 세 가닥 산자락은 울퉁불퉁 뻗어서 삼랑(三浪)의 물에 떨어지고, 일곱 고을 긴 강(江)의 흐름이 작원(鵲院)을 안고 돌아 산이 웅장하고 물이 아름다운 것으로 남주(南州) 제일(第一)의 형승(形勝)이라고 일컬어 온 곳이다. 만어산(萬魚山) 서남(西南)쪽에 위치한 임천(林川).숭진(崇眞).청학(靑鶴).용성(龍星).용전(龍田).율동리(栗洞里) 등 일대의 지역은 고려시대(高麗時代) 이래 금음물부곡(今音勿部曲)의 옛 터이다. 쇠점(金店), 통점(桶店), 사기점(沙器店), 칠기점(漆器店), 가래점(楸店) 등의 지명이 시사(示唆)하는 바와 같이 부곡(部曲)이 특수한 기술과 직업에 종사하는 백성들의 거주지(居住地)임을 말해 주고 있는데, 조 조(朝鮮朝) 초기에 이 곳 토성(土姓)으로 제씨(諸氏)가 많아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고려(高麗) 중기에는 남쪽 해연(海沿)에서 개경(開京)에 이르는 교통상 요지(要地)로서 당시 金州道(金海)의 無月伊驛(無訖, 지금의 美田)이 있었던 곳이며, 낙동강(洛東江) 북쪽 벼랑에 작원관(鵲院關)이 자리잡아 국방상의 요충지로도 알려져 왔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겪은 후 16세기 초에 면방(面坊)의 구역(區域)을 정비할 때 상동면(上東面), 중동면(中東面)과 나란히 본군(本郡)의 아래쪽에 위치했다고 하여 하동면(下東面)이라 했으며, 당시 방리(坊里)로는 금음물리(今音勿里), 광탄(廣灘), 만어사(萬魚寺), 삼랑리(三郞里), 무흘역리(無訖驛里), 율동리(栗洞里), 안태리(安泰里), 부암(父庵), 작원리(鵲院里) 등 구방(九坊)이 있었다. 그 후 18세기 초에 하동면(下東面)의 방리(坊里)로 안태리(安泰里), 율동리(栗洞里), 칠기점리(漆器店里), 무흘리(無訖里), 숭진리(崇眞里), 청용리(靑龍里), 삼랑리(三浪里) 등 7개 방리(坊里)로서 재정비(再整備)되어 종래의 금음물리(今音勿里), 광탄(廣灘), 만어사(萬魚寺), 부암(父庵), 작원리(鵲院里) 등의 이름이 없어진 반면, 칠기점리(漆器店里), 숭진리(崇眞里), 청용리(靑龍里) 등의 지명(地名)이 새로 등장하였다.


19세기 중엽에는 일시 하동면(下東面)을 하동초동면(下東初同面)과 하동이동면(下東二同面)으로 분리했는데, 초동(初同)에는 미전(美田), 용전(龍田), 우곡(牛谷), 율동(栗洞), 삼랑(三浪), 송지(松旨), 검세(儉世), 안태(安台), 행곡(杏谷) 등 구개리(九個里)가 소속되고, 이동(二同)에는 옛날 금음물부곡(今音勿部曲)의 판도(版圖)인 임천(林川), 숭진(崇眞), 청학(靑鶴), 용성(龍星) 등 사개리(四個里)가 소속되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行政區域) 개편시(改編時)에는 종전의 자연 부락을 통폐합하여 임천(林川), 숭진(崇眞), 청학(靑鶴), 용성(龍星), 미전(美田), 용전(龍田), 우곡(牛谷), 율동(栗洞), 삼랑(三浪), 송지(松旨), 검세(儉世), 안태(安台), 행곡(杏谷) 등 지금과 같이 13개 里로서 법정리(法定里)로 삼았으며, 김해군(金海郡) 생림면(生林面) 도요리(都要里)에 소속된 유도(柳島) 부락(部落)을 본읍의 송지리(松旨里)에 편입시켰다. 1918년에는 하동면(下東面)을 삼랑진면(三浪津面)으로 명칭(名稱)을 바꾸었는데, 이미 그 이전에 경부선(京釜線)과 진주선(晉州線) 철도(鐵道)의 분기점(分岐點)으로서 삼랑진역(三浪津驛)이 생겨 교통과 산업의 중심지로서 도시화(都市化)했을 뿐 아니라 하동(下東)의 일본식 발음이 하등(下等)과 같으므로 어감(語感)이 좋지 않다고 하여 면소재지(面所在地) 지명(地名)대로 개칭(改稱)한 것이다. 1963년에 면내(面內)의 인구 증가와 면소재지(面所在地)의 도시화(都市化)로 삼랑진읍(三浪津邑)으로 승격(昇格)되었으며, 1966년에는 임천리(林川里)에다 읍(邑)의 출장소(出張所)를 두어 임천(林川).숭진(崇眞).청학(靑鶴).용성리(龍星里) 등 옛날 금음물부곡(今音勿部曲) 지역 동리(洞里)의 행정관할(行政管轄) 편의(便宜)를 도모했다. 현재 삼랑진읍(三浪津邑)은 13개의 법정리(法定里)에 종전 59개의 자연(自然) 부락(部落)을 통폐합한 31개의 자연 부락을 통폐합한 31개의 행정리를 거느리고 있다.


밀주구지(密州舊誌) 등 문헌(文獻)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왕당평(王堂坪)과 왕정자(王亭子), 만어사(萬魚寺), 부암(父庵) 등의 불교유적(佛敎遺跡)이 있고, 고려시대(高麗時代) 유적으로 금음물부곡(今音勿部曲)을 비롯하여 삼랑루(三郞樓), 무흘역(無訖驛) 등이 전해지고 있으며 종병탄(鍾兵灘), 시목포(枾木浦), 광탄(廣灘), 작원관(鵲院關) 등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전적지(戰跡址)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만어화석(萬魚化石), 오우정(五友亭), 인전소(印轉沼), 원추암(員墜岩), 승교(僧橋), 부암(父庵) 등에 얽힌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高麗)의 스님 원감(圓鑑)의 삼랑루시(三郞樓詩), 조선조(朝鮮朝)의 부사(府使) 안주(安宙)의 만어사시(萬魚寺詩), 낙원(樂園) 안숙(安璹)의 한남루시(韓南樓詩) 등이 지금까지 회자(膾炙)되고 있다.


조선조(朝鮮朝) 후기의 유적으로는 삼랑후조창(三浪後漕倉)의 구지(舊址)가 남아 있어 당시 번화했던 강변 나룻터의 풍경과 조세(租稅) 징수 및 조운(漕運)에 얽힌 갖가지 민담(民譚) 등이 전해지고 있다. 일제(日帝) 때는 삼랑진역(三浪津驛)을 중심으로 일본인(日本人) 상인(商人)과 농장주들이 수백 명이나 거주했으므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헌병대(憲兵隊), 경찰파출소를 비롯하여 과수원, 시장 .일본인 학교, 각종 상점 등이 일찍부터 들어서서 도시화를 이룬 지역이다. 또 근년에는 안태리(安台里)의 천태산(天台山) 기슭에 낙동강 물을 끌어 올려 인공호수(人工湖水)를 만들고 거대한 발전소를 건설함으로써 이 일대는 빼어난 관광지로 바뀌어 원근(遠近)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